중학생 때 쓴 첫 소설에서 훈남에게 사랑받던 여주인공은 죽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다소 바랐던 경험이 있어서일 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모든 드라마에는 죽음이 있었다. '가을동화'에 송혜교도 파리한 모습으로 한웅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청초하게 바라보고는 죽었고 송승헌도 우수에 찬 눈빛으로 달려오는 차의 쌍라이트를 조명 삼아 죽었다. '미안하다사랑하다'의 소지섭도 죽었고 색색깔 빅사이즈 니트와 어그부츠로 사랑스러운 히피의 멋을 냈던 임수정도 죽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은 발리에서 주인공 세 명이 다 죽는다. 그 시절의 죽음은 아름다움이었다. 친구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책상에 줄지어 앉아 점심시간만 기다리던 보잘것 없는 여학생의 보잘것 없는 경험의 스펙트럼으로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게하는 낭만적인 드라마 뿐이었다. 그 시절 죽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20살이 갓 넘은 어느 날 왜인지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대학에 왔지만 하고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삶은 허무하고 나는 초라했다. 말하다가도 울고 술먹다가도 울었다. 나는 나에게 기괴한 주사가 있는 줄 알았다. 하루는 주절주절 떠들다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 한 번 뿐이라는 게 너무 충격적이야."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혹등고래 아가리 속에 유폐된 피노키오처럼 내 자신이 쓸모 없게 느껴졌다. 당시 유행하던 '사이좋은 월드'에 일기를 썼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 그러자 어렸을적 부터 담배를 꼬나물고 팩 소주를 빨며 밴드활동을 하던 내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인간에게 생산적인 일은 임신밖에 없어.'
임신은 자신 없었고,
열심히 살아야했다. 딱히 어려움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세상에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 내 '쓸모'를 찾아야 했다. 학교다니면서 일을 했고 학교를 한 번 더 갔고 완전한 독립을 했다. '쓸모'라고 불릴만한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생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만원짜리 티셔츠 한 장 사기 두려웠던 생활고, '쓸모'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했던 재능, 시간 아끼려 끼니도 갈아먹고 때웠다는 사람들에 비해 한없이 부족했던 의지와 체력. 그 보다 더 무거웠던 것은 갑작스레 내 존재의 소멸이 현실적인 두려움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살면 살수록 죽음은 두려웠다. 미국의 가난한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The House on Mango Street을 읽으며 옥상에서 날아오르듯 뛰어내린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천진한 죽음이 잊히지 않았다. '히틀러의 아이들'을 읽으며 전쟁에 이용된 소년병들의 숭고한 죽음을 향한 집념에 충격을 받았다. 세월호가 아이들을 끌어안고 바닷 속으로 가라 앉는 화면을 뉴스로 보면서 비빔밥으로 배를 채웠다.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
이제 죽음은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인생의 모든 고민 기저에는 죽음이 있는 거 같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하는데..' 왜? '직장이 불안하면 잘릴 수도 있으니까' 그게 왜? '잘리면 돈이없잖아' 그게 왜? '돈이 없으면 병원비도 없을 거고,굶어 죽을 수도 있잖아' 그게 왜? '죽는 거 무섭잖아'
'결혼하려면 돈을 모아야 하는데' 왜? '돈이 없음 집도 못사고, 먹고 살기 힘들고, 돈 때문에 싸우기만 할 수도 있잖아.' 그게 왜? '집이 없으면 떠돌아다녀야 하고 먹고살기 힘들면 굶어 죽을 수도 있고 싸우다가 헤어질 수도 있잖아?' 그게 왜? '내 자리가 없을까봐 두렵고, 죽을까봐 두렵고, 혼자일까봐 두려우니까'
그래서 지금 나의 과제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모셔둔 신전에는 언제나 죽음이있다.
죽음에 관한 책을 몇 권 읽기는 했지만 이처럼 직설적으로 나의 고민을 꿰뚫는 제목은 없었다. 저자가 서울대 의대 교수님이셔서 더 신기했다. 보통 죽음은 영적인 영역으로 치부해서 과학적 사고를 하는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는 인기 없는 주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현채교수님은 2003년 부터 죽음에 관심을 가졌고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사후생'을 읽으며 더 깊은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무수한 강의와 소통으로 많은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왔다. 최근에는 교수님도 암을 진단받았다. 교수님은 이를 환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로 여기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신다. 자신의 영정사진을 고르고, 초대할 손님의 범위를 정하고, 장례절차와 유품도 정리했다.
책에는 근사체험(죽음의 세계에 들어섰다 다시 살아나는)의 여러 사례를 들고 있다. 근사체험 시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과 함께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고 삶을 회고하며 빛을 따라간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공통적인 경험을 하는 데다가 근사체험 중에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 이를 정신병리적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정신병적 환상을 겪는 사람은 두려움에 차있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데, 근사체험 이후의 사람은 평온하고 자신의 상태와 죽었을 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근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삶을 이해하며 타인에게 더 도움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한다.
책은 근사체험 연구를 소개하며 죽음 후의 생이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인간의 영혼은 저마다의 주파수가 있어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성장하는 수준에 따라 다른 파장을 낸다. 비슷한 파장을 가진 영혼들끼리 모이게 되고 그들이 지구로 다시 올 때에는 자기만의 '성장의 과제'를 안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해 얼마나 공부했나, 타인에게 얼마나 베풀했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했나, 그런 질문들일 뿐이다.
그리고 저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어떻게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이 왜 중요한지, 죽어가는 이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설명해준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두렵기에 삶은 불안함으로 요동치고,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불안한 개인은 괴롭다. 괴로워서 다른 이들에게 해를 가한다. 결국 지옥같은 마음에 갇혀 가해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무지도 악이다. 우리 모두는 사형선고를 받은 존재들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정확히 알아가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